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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선거로 공산당 정권을 수립했던 ems 남부디리파드가 적은 간디 비판서를 번역했습니다.
역자 요약올려드립니다. 이 요약의 목적은 내용 전달이 아니라 읽으시는데 맥을 잡는데만 목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된 간디의 입장 하나는 1)자신이 (비공식, 공식적으로) 최고 정점에 서서 2)독립이던 자치이던지 영국과의 협상을 ‘비폭력의 승리’를 원칙으로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 남아프리카 - 서구교육을 받은 엘리트 간디.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에 관한 기본적인 트레이닝을 끝냄.

 

*1차 시민불복종 _ 최초로 인도 민중을 하나로 통일시킨 위대한 영혼 간디의 등장. 자치를 목표로 협상, 독립은 상상도 안하고 있고 오히려 반대. 무슬림과 연대 본격 시작. 시민불복종 철회이후 무슬림을 마치 남인양 대해서 무슬림들 배신감 느낌.그래도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진나는 간디와 국민회의에 미련이 있었음

 

*소금대행진 _ 자치를 목표로 협상. ‘독립’ 요구에 대해 계속 무시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는 행동.

지속. 간디가 그러는 중에 간디의 비폭력사상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다른 나라들은 민족해방운동을 하나 둘 씩 성취하고 있었음

 

*선거 _ 힌두가 다수가 되자 무슬림 완전 무시해버림. 우호적인던 진나를 정점으로 해서 무슬림들이 자신들만의 나라를 생각하게 만들어버림. 꼬뮤날 분열을 완전 확장시켜버림.

 

*퀵 인디아 _ 드디어 독립을 목표로 협상, 영국 정부가 말로 해서는 안 듣는다고 판단. 폭력을 방치한 후 군인들과 공무원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정부를 위해서는 진압을 하지 말라고 하면  군인들과 공무원들이 자기 말을 듣고 가만 있게 되면 영국은 봉기가 더욱 확대될 것에 겁 먹고 독립을 시켜줄 것으로 오판. 더더구나 짧게 끝날 줄 안 대중봉기는 국민회의 집행부 전원이 영국에 의해 구속된 후 자신의 예측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 국민회의 소속이었지만 "간디의 아이였지만 맑스의 학생"인 JP 나라얀과 아사프 알리에 의해 운동이 '비폭력 사상'과 전혀 관계 없이 지도됨. 간디가 쫓아낸 네타지의 인도국민군 등은 온 국민의 독립의 열망을 더 거세게 함. 거기다 더해서 무슬림들은 독립이 다가온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계속 무시 당하는 상황은 독립 이후에는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서 파키스탄 건국 추진하기 시작..간디 무슬림에게도 얻어 맞는 상황. 당황 & 당황. 그래도 대중을 향해서는 ‘비폭력’ / 영국에게는  ‘내가 협상할 수 있어’라고 계속 이야기.

 

*퀵 인디아 이후 _ 독립을 목표로 협상을 원하는데 대중봉기는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로 협상을 할 최고 정점의 위치를 상실 .이제는 좌절. 좌절. 좌절.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대중봉기와는 다르게 힌두-무슬림 분열에 대해서는 자신이 해야할/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깨달음

 

*독립 전후 _ 파키스탄은 건국되었음. 대중봉기를 지도하던 좌파들도 자리를 잡음, 권력을 잡고 급격히 부패하게 된 국민회의는 간디를 버리기 시작.  이 국민회의가 현재의 인도의 모습을 만들었음.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던 그가 당시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인 힌두-무슬림 갈등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장렬하게 순교. 마하트마 간디는 위대하다! 그러나 이 순교에 의해 그의 모든 과오는 다 덮혀버리게 됩니다.

 

죽음 직전의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깁니다. 본문 인용합니다.

 

"명예롭게도 간디는 권력 이양에까지 이른 그 진전이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이 설파했던 원칙의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암시한다는 것을 ‘정직하고도 전적으로’인정했던 유일한 국민회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말해야 될 것 이다. 7월 14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실천해온 것은 비폭력 저항이 아니었고 비폭력 저항을 할 수도, 하려는 의지도 없기에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나선 연약한 사람들이 내세운 수동적인 저항이었습니다. - 본문 P.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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